나의 애독시(327)

♬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마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어느 시인은 “조병화 시인의 시에서는 어디서든 난해한 데라곤 없다. 그저 술술 읽히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어떻습니까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보이는 것 같지요. 사랑이 갈라서는 것이 보이네요. 맞잡았다 놓는 당신과 나의 손을 안개가 잡아 쥡니다. 안개를 두른 당신과 나의 행로에 대해 알 방도가 없습니다. 나는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지만, 당신은 남쪽으로 천 리를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가야 할 거리보다 당신이 가야 할 거리가 까마득하게 더 멉니다요. 당신이 나를 떠나보내는 거리보다 내가 당신을 떠나보내는 거리가 훨씬 멉니다. ‘자, 그럼’이라는 대목은 또 어떠한가요? 가슴이 짠해 오지요.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단호한 듯 순응하는 듯 ‘자, 그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음색에는 애써 숨긴 슬픈 이별의 기색이 역력함을 느낄 수 있지요. 이럴 때는 말도 이미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순간이 되겠지요. 막막함만이 감도네요.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