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254) : 추억 / 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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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254)

 

추억 /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아아~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앞산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나흘

닷새

엿새

 

여름 가고 가을 가고

나물 캐는 처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산에

 

아아~

이 산에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앞산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나흘

닷새

엿새

 

 

최영섭 / 아름다운 인연

 

나는 어딜 가나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라고 소개된다. 그러나 정작 내가 제일 아끼는 가곡은 1949년에 작곡한 추억이다. 조병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추억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조병화 시인과의 잊지 못할 시간들 속에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병화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조 선생과는 나이 차이도 꽤 있던 터라 그때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전에 첫 작곡발표회를 갖고 난 후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여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하였다. 그 무렵 서울의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조 선생과 가까워졌는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차 안에서 두세 시간씩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이 쌓여갔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럭비 선수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던 조 선생은 그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문학을 좋아하여 문학작품을 많이 읽던 터라,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우리는 공원에서, 다방에서, 바닷가에서 문학과 음악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인천에서 조 선생과 나는 송도 앞바다에 자주 갔다. 서해에 떨어지는 해와 붉게 물든 하늘의 장관을 바라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그 시절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조 선생은 작은 술이라도 한 병 가지고 간 날은 안주도 없이 혼자 한 병을 다 비우고는 어둠이 깔리는 바닷가에서 큰 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의 여류 피아니스트 R 씨의 피아노 독주회가 영화관인 표관에서 열려 조 선생과 함께 갔다. 그녀의 독특한 터치와 표현, 화려한 의상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다방에서 연주회의 느낌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작곡 공부를 하는 학생으로 연주를 감상하고 느낌을 말했지만, 조병화 선생은 그 피아니스트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 조 선생은 한국판 베를리오즈가 된 것이었다.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20대 초반, 영국 셰익스피어 극단의 여주인공 해리엘 스밋슨의 연기와 미모에 홀딱 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함)

 

그날 이후, 조 선생의 가슴에는 피아니스트 R씨에 대한 그리움이 자라기 시작했다. 만나본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나눈 일도 없이, 가슴 가득 이루지 못할 사랑이 커갔던 것이다.

 

1949년 초겨울이었다. 그날도 조 선생과 둘이서 송도에 갔다. 검은 갯벌에 나란히 앉아 찬란하게 물든 서해의 낙조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 선생이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러고는 어찌하지 못하는 괴로운 얼굴로 즉흥시를 읊는 것이었다. “잊어버리자고 바다기 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 무리 사라진 겨울 바다에…….” 나는 재빨리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그 시를 받아 적었다. 그날 밤 자정을 넘긴 시각, 내 작곡 생애 가장 애지중지하는 곡 추억이 완성되었다. 조병화 시인은 영원히 만나지 않은 한 여인으로 하여 그렇게 수많은 그리움의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생전에 60권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문학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겼다. 평생을 가족처럼 지내온 조병화 시인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가슴은 조 선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 시는 1949년에 간행된 조병화의 첫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에 수록된 시입니다. 최근 거닐었던 바다 기슭에서 1940년대 시인이 걸었던 바다를 떠올렸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바다인가 봅니다. “잊어버리자고걸어보던 날이 하루가고 이틀가고 사흘이 지나도 잊히질 않아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 바다에 다시 섭니다. “잊어버리자고다시 바다 기슭을 걸어 보는 겁니다. 바다는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잊어버리자고 가는 듯 하지만 사실은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가는 곳입니다.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끊임없이 다짐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 누군가를 마음껏 생각하기 위해 바다를 걸어 보는 것입니다. 온종일 잊어버리기 위해 기억합니다. 잊어버리기 위해서라고 애써 생각해 보지만 잊어버리자고생각하면 할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할 뿐입니다. 하얀 포말(泡沫)로 부서지는 바다를 기억합니다. 바다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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