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231) : 눈 오는 날 / 복효근

눈잎.jpg



나의 애독시(231)

 

눈 오는 날 / 복효근

 

 

눈이 온다

이렇게 오래된 풍경 앞에서도

살아있음이 두근두근 설레는 날이 있거니

참으로 진부한 이 설레임으로

불러보고 싶은 이름 있어

 

세상은 그 진창을 잠시 숨겨놓았을 뿐이지만

눈이 내리는 동안만이라도

눈이 쌓여있는 동안만이라도

그 빛깔로 기억하고 싶은 시간은 있어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나 잊어버릴

이루지 못한 약속처럼 귀하고 또 가슴 애리게

슬픔 같은 것 부끄럼 같은 것들이

눈으로 내리는가

 

이제는 오지 않을 날들 위로

이제는 갈 수 없는 길들 위로

아주 옛 것인 듯 처음인 듯 가슴 후비며

눈이 온다

 

사랑했노라 사랑했노라고

진부한 그 설레임으로

살아있음을 편지 쓰고 싶은 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누군가를 절절하게 껴안아보고 싶은 날, 문자메시지를 여기저기 날리고 싶은 날, 강아지와 함께 달리고 싶은 날, 게으름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날, 부모님께 무엇이라도 사드리고 싶은 날, 친구들과 더불어 왁자지껄 떠들며 술 마시고 싶은 날, 오래도록 하얀 눈꽃을 바라보고 싶은 날, 사랑한다는 말을 자꾸 하고 싶은 날, 그리고 편지 쓰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눈 오는 날에는 수취인이 없는 편지라도 꼭 편지를 한번 써보도록 하세요. 어쩌면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내가 명백히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표현이 아니겠어요? 눈 오는 날이면 민감해지는 당신, 그 진부한 설렘이 아니더라도 편지 속에 슬픔 같은 것 부끄럼 같은 것을 적어 당신의 마음을 전하세요. ‘이제는 오지 않을 날들 위로 / 이제는 갈 수 없는 길들 위로 / 아주 옛 것인 듯 처음인 듯 가슴 후비며 / 눈이오고 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그리고 아래 시에서는 사십도 안 된 주제에 눈 오는 날 회상의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같은 시인의 다른 시 한 편도 같이 읽어보시지요.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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