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193) : 폭설(暴雪) /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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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193)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이 시를 읽으면서 빙그레 웃었습니까, 아니면 킬킬 대며 소리 내어 웃었습니까? 저도 처음에 이 시를 읽고 나서 넘 재미가 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를 한 편의 시로 엮었죠. 일상생활에서는 이라는 말이 본래의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장소나 쓰임새에 따라서 어감이나 의미도 영 달라지네요. 어지간해서는 눈이 오지 않는 땅끝 마을에 어느 겨울인가는 참 오지게도 눈이 많이 내렸나 봅니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옹기종기 모여든 주민들이 힘들여 눈을 치우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걸치고 따뜻한 잠이 들었건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내린 폭설은 축사 지붕까지 몽땅 무너뜨렸나 봅니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그러나 동네 이장의 질박한 말투에서 역설적이게도 내일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시를 읽고 웃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이 시의 끝은 웃음이 아닙니다. 폭설에 삶의 터전이 무너진 농부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어야겠죠. 그래서 이 시를 처음 읽을 땐 웃음 터져 나오고, 두 번째 읽으면 쬐끔 슬퍼지는 시랑께. ()

 

욕설도 이렇게 재미있는 시가 될 수 있다니요! 한겨울 방 안에 앉아 내리는 눈을 보며 마음의 폭설을 만끽하고플 때, 이 시를 만난다면 겨울밤도 참 따뜻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남도 땅 어느 외진 동네가 그려지고 이른 아침 확성기를 통해 이장의 방송이 들리는 듯합니다. 전라도 사투리의 구수한 욕설을 섞어 동네 사람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눈을 치우고 잔 밤 또 눈이 수북이 내려 다음 날 아침 또 이장이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하고 방송합니다. 눈을 치우고 소주를 마시고 잠이 든 다음 날 아침, 더 많은 눈을 본 이장이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하는 말에 독자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설도 상황에 맞으면 욕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눈 내림의 점층화와 욕설의 점층화를 대비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폭설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렵거나 걱정거리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겨울 눈 세상에 젖게 합니다. 이는 욕설이 가지는 미학성과 3연에서 보여주는 성적인 미학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라는 구절을 통해 낮에 그 힘들었던 고단함이 밤에는 각자 아내의 품에서 그 고단함을 풀고 있다는 상상 때문일 겁니다. 이는 눈에 파묻힌 세상이나 아내의 치맛자락의 품에 파묻힌 세상이나 상통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만요. 오늘 밤 혹시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봅니다. 아파트 화장실문을 모과빛 장지문으로 바꿔 달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창문으로 김이 서린 아내의 실루엣이 비칠지 누가 알겠습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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