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165) :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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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165)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세월 갈수록 시에 나오는 벗과 같은 벗이 그리워집니다. 내 마음 울적할 때 강물 같은 벗 하나가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흘러간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습니까요. 지내온 경력을 내세우며 현재의 자기 처지를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위와 같은 친구가 절대 될 수가 없어요.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척하며 상대방을 이용하는 친구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요. 내 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다가오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과 힘이 되겠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넘어가야 할 고갯길이 있다면 할 수 없이 혼자라도 넘어가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힘겹겠지만 어쩌겠어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비행기도 고속철도 축지법도 아닌 좋은 벗과의 동행이라고 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좋은 친구와 마시는 술이며, 그때의 술은 장소나 주종에 관계없이 그윽하고 깊습니다. 자본을 신봉하며 도회에 사는 사람은 우선 세 부류의 친구, 즉 금융인, 법조인, 의료인을 한 명씩은 곁에 두고 요긴할 때 도움받으라고 처세술에서는 조언합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거나 함께 술을 마실 때 유효한 벗은 무엇보다 말의 소통이 잘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일단 지루하지 않고 술도 술술 잘 넘어가는 법이지요. 그러자면 화제도 한두 영역에 갇혀서는 재미없고 경계와 문턱 없이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어야겠지요. 김수영의 시를 이야기하다가 돌연 남편/아내의 잠버릇 흉을 보기도 하고 아이들 교육을 걱정하다가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을 성토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감성의 주파수까지 딱 들어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견이 있을 때 상대의 생각을 꼭 내게 맞추려 고집하다 보면 우정은 멀어지고 애정은 더 멀리 달아납니다. 정치적인 견해도 진실에 기반했다면 차이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똘레랑스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 친구 그런 점만 아니면 참 괜찮은 친군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고 그 단점은 대체로 장점과 같은 세포군 안에 존재하는 속성이기에 단점을 제거하면 장점마저 사라져 버립니다. 어떤 친구가 성격이 너무 급해서 문제가 있다면 그만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장점이 있기 마련이고, 성격이 느긋해서 탈이라면 사려 깊음이 장점이기 십상입니다. 장점만으로 조합된 인간을 기대하기란 하느님의 재림만큼이나 어려우므로, 우리는 다만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녁 강물 같은 벗은 말을 해도 알고 하지 않아도 아는 친구이지요. 좋은 일엔 초대해야만 오지만 어려울 때는 부르지 않아도 나타나는 친구입니다.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는 돈이 필요할 때 꼭 돈을 꾸어주지 않아도 되고, 내가 송사에 휘말렸을 때 굳이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무방하며, 비밀스런 내 병의 주치의 노릇을 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다 관계의 밀도가 느슨해질 염려도 있겠지만 관계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분답(紛沓)하지 않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이면 그만입니다. 인디언 말로 친구인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업고 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가장 낮은 강물이면서 높은 벗이 아니겠습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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