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463) : 억새꽃 / 유강희

억새9.jpg



나의 애독시(463)

 

억새꽃 / 유강희

 

 

억새꽃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명절날 선물 꾸러미 하나 들고 큰고모 집을 찾듯

해진 고무신 끌고 저물녘 억새꽃에게로 간다

 

맨땅이 아직 그대로 드러난 논과 밭 사이

경운기도 지나가고 염소도 지나가고 개도 지나갔을

 

어느 해 질 무렵엔 가난한 여자가 보퉁이를 들고

가다 앉아 나물을 캐고 가다 앉아 한숨을 지었을

지금은 사라진 큰길 옆 주막 빈지문 같은 그 길을

 

익숙한 노래 한 소절 맹감나무 붉은 눈물도 없이

억새꽃, 그 하염없는 行列을 보러 간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억새꽃도 알고 보면 더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제 속에서 뽑아 올린 그 서러운 흰 뭉치만 아니라면

나도 이 저녁 여기까진 오지 않았으리

 

 

가을날의 억새꽃은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억새꽃이지요. 물론 이때 억새를 보는 사람은 억새의 배후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억새꽃의 슬픔이 보입니다. 시인도 저물녘에 그런 흰 뭉치의 서러움에 감염되었나 봅니다. 이 시의 요점은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 꼭 그만큼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어떤 거리일까요? 멀리 떠나고 싶은데 떠날 수 없는, 못난 삶의 운명 같은 것일까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진한 그리움 같은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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