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179) : 향수, 고향 / 정지용
- 서건석
- 2024.12.23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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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179)
♬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고향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 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은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이래저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지용의 이 두 편의 시를 한꺼번에 싣습니다. 이 시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향수가/고향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된 향수로/고향으로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감각적인 우리말의 뛰어난 구사력과 청각적, 시각적 이미지 등 수준 높은 이미지 활용은 우리 근대시에 현대적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어 준 선구적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그 옛날 1930년대에 고향에 대한 시적 정서를 이처럼 차분한 어조와 빼어난 구사력으로 노래했다는 사실에 저로서는 그저 경탄과 찬탄을 표할 수밖에 없네요. 세월이 흘러도 한국시를 대표하는 명시로서 그 가치를 조금도 잃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향수는 추억이나 사물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이라고 하지요. 시인의 지극한 그리움은 고향집과 들판, 그리고 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들 어릴 때 살았던 고향과 그 가족이 그립지 않을까만 그 마음을 표현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지용 시인의 특기인 섬세한 언어 구사력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詩입니다. 처음부터 환경묘사가 그림보다 더 리얼하게 펼쳐집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여기서 넓은 벌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우리는 시골의 넓고 싱그러운 초록의 들판을 떠 올리게 됩니다. 실개천이 동쪽에서 곧바로 흐르지 않고 휘어져 흐르며 지줄댄다는 표현에서 마르지 않고 쉼 없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는 청각적 연상까지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 음 연 사이마다 후렴처럼 반복되는 짧은 연이 절창입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그저 평범한 싯귀 같은 한 연에 마음을 다 담은 것 같습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는 시간이면 밤이 깊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삼라만상이 잠들 듯 고요해지면 밤바람 소리는 말 달리는 소리처럼 더 크게 울리듯 들렸을 겁니다. 늙으신 아버지는 숙면에 들지 못해 짚베개를 돌려가며 높이 베고 계셨던 곳, 흙에서 자란 마음이 파란 하늘빛을 그리워하고 풀섶 이슬에 바지 가랑이를 휘적시던 곳 그곳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요. 일곱째 연에 누이의 묘사가 환상적입니다. ‘전설의 바다에서 춤추는 밤물결 같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이런 구절이 시를 시답게 하는 게 아닐까요. 그에 비해 아내의 묘사는 너무나 소박합니다. 요즘 아내들 같으면 어쩜 서운하리만치 소박합니다. 그래도 그 소박함 속에 아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몇 겁의 인연 속에 맺어진 정을 느끼게 해주니 역시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초라한 지붕 밑에 흐릿한 호롱불 앞이지만 도란도란 가족이 정겹게 마주 앉아 하루를 마감하며 내일을 꿈꾸는 일이야말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그는 절대적인 사랑과 행복을 길게 누리지도 못한 채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천재는 요절한다는데 그도 천재였기에 그렇게 됐나 생각하면 보통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 전체가 6연으로 짜여져 있는 이 시(고향)는 1연과 6연이 2연에서 5연까지를 품고 있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용은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 세월이 흐른 뒤에 어릴 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미 그 자신의 추억 속에 잠겨있는 그 ‘고향’은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없어서 서정적인 비애감에 사로잡힙니다. 어쩌면 고향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고향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시적 화자의 영혼과 정서가 그것을 예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성장 과정에서 더 큰 세계에 대한 경험과 역사의 뼈아픈 상처 등이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해 가졌던 포근함과 정겨움을 앗아 갔을 수도 있는 겁니다. 즉, 자연은 불변적 · 영속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유동적이며 단절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흔히 인생무상의 정서를 제시할 때 쓰는 수법이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사를 대조시키는 것인데, 이 시에서도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고향 상실의 허무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대 상황과 연관지어 볼 때, 일제 강점하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느꼈던 ‘고향 상실 의식’과 관련지어 볼 수도 있습니다. 일제가 짓밟아 버린 조국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지고 시적 화자는 그저 나그네로만 여겨지는 뿌리 깊은 비관적 현실 인식과 상실 의식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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