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177) : 호수 / 이형기

호수.jpg



나의 애독시(177)

 

호수 /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단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사랑으로 설레던 젊음의 가슴이 어느덧 은행잎 지는 가로수 길에 서면 내가 너를 무수히 기다렸던 일들이 무성했던 여름날의 나뭇잎처럼 지나간 아득한 모습이고 부질없어 보입니다. 이제 사랑은 바람처럼 나를 떨리지 않게 하고 아침 호수 수면처럼 나를 들뜨지 않게 해줍니다. 지금 보면 진정한 기다림이란 결국 이런 잔잔한 호수를 마음속에 지니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기보다 당연한 삶의 귀결이 아니겠어요? 그저 안으로 침잠해서 조용히 모든 것을 아우르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만 남았나 봅니다. 이게 나이 듦에서 오는 혜안(慧眼)이자 축복된 자세가 아니겠어요. ()


 

시의 처음 부분을 보면 화자는 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화자의 상황은 부재하는 이를 기다리는 상황이며 화자의 정서는 당연스럽겠지만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에서 화자의 모습은 예전의 나무처럼 무성하던 청춘이 아니라 잎 지는 호숫가의 이미지로 그려지며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우게 됩니다. 이때 호수로 비유한 것은 화자가 호수를 내면적 동일화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연에서는 화자의 내면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랑은 화자를 울리지 않고 화자에게는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죠. 이 조용히 우러른다는 것은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으로 잎 지는 것 같이 쇠락했던 화자의 마음이 고요한 기다림의 자세를 가지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4연에서는 이러한 화자의 모습을 호수의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불고가는 바람에 떨던 호수는 이제는 고요해져 있는 모습을 통해 화자는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5연에서 화자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라고 하며 사랑이 지배하던 청춘이 소멸해 감을 바라보면서 기다림의 눈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화자 내면의 성숙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자신의 내면 변화를 호수와 동일화하여 이 시는 호수와 같은 기다림의 태도와 내면의 성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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