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171) :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원재훈

은행잎1.jpg



나의 애독시(171)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원재훈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이 시를 읽다 보니 갑자기 은행나무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려보고 싶어집니다. 어떤 기다림이었기에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내 삶속에 그대가 걸어 들어오는 그 한순간, 그 아름다운 한순간. 빗방울이 곧 시간으로 변하고 기다리는 내가 한 장의 은행잎으로 변하는 순간에 시인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를 만납니다. 무슨 남자(시인)가 뭐 이다지도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력과 감수성을 지닐 수 있나 싶어 저로선 희한하고 신기한 느낌까지 듭니다. 은행잎보다 더 작아지고, 빗방울보다 더 작아진 나는 그대가 오는 아름다운 한순간을 기다려온 것을 모르다뇨. 짐짓 그렇게 한번 투정 어린 능청을 부려본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날로그 시대의 연시의 대명사 같은 좋은 시 한 편을 만났어요. 보낸 시간을 초까지 알 수 있는 이메일을 넘어 이젠 언제나 내 살처럼 곁에 붙어 있는 휴대폰 카톡 시대에 이 시는 많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어요. 펜팔을 해보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시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임을 알 겁니다. 손으로 편지를 쓰고 우체부의 손을 빌려 편지를 받아보던 시절에는 기다림이 기대감을 갖게 하여 좋았었지요. 내가 쓴 편지가 상대방에게 도착했는지 궁금한 것도 좋았고, 지금쯤 편지를 쓰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휴대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약속한 사람이 그 시간에 오지 않으면 바람 맞은 것 같기도 하여 화가 나다가도 무엇이 잘못된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구요. 혹여 무슨 다른 좋지 못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었지요. 시에서 화자는 오지 않는 사람을 비와 더불어 하냥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예사로움을 넘어 지고지순의 감동을 줍니다. 불 꺼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이 시귀(詩句)를 대하고 나면 가슴이 턱 막힙니다.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오는 이 비가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다시 비가 되어 이 은행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도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씀이외다. 기다림도 이쯤 되면 기다림의 극치요, 예술입니다요. 시에 드러난 이미지는 어떻게 보면 단순합니다. 시어들이 갖는 조응은 눈부시고, 작은 지점이 우주까지 다시 한 장소의 물방울로 수렴하기까지, 시적 사유는 싱싱하고 또 개연성과 견련성으로 우주의 질서를 그리듯, 아름답습니다.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무궁과 궁극에 가서 닿는 의미라면, 이 시는 너무나 쉽고 동시에 너무나 어려운 시일지 모릅니다. 시어의 알고리즘에서 일탈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진동과 큰 아우라를 가집니다. 시는 추억을 소환하는 고전적인 모습처럼 그려졌으나, 이 시의 내면은 미래가 가진 알 수 없는 존재성과 진지성과 진정성을 아우르고 있어서 감동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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