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724) : 물 끓이기 / 정양


물끓이기2.jpg




나의 애독시(724)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은 좀처럼 끓어오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참고, 겁이 많아 지레 몸부터 도사리고, 지은 죄가 많아서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불의를 보고도 용기가 없어 외치지 못합니다. 도대체 열 받을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모두들 우파(?)들 같아요. 아니면 자기 잇속과 관계가 없든가. 언뜻 보면 모두 화평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사는 듯합니다. 저부터 그러니까 말한들 무엇 하겠습니까요. 시인은 그래서 더 열받습니다. ‘열받는다라는 신세대 언어를 나이 든 시인이 굳이 쓴 까닭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며 열받았다는 뜻이겠지요. 격정 없이 굴러가는 이 세상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

 

화자는 끓는 물을 보면서 끓어오를 일이 많지만,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을 비판하고 마음 놓고 끓어오르지 못하는 자신의 소시민성에 대해 반성하고 있어요. 나아가 마음 놓고 끓어오를 수 있는 세상과 당당하게 끓어오를 수 있는 자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노, 스스로의 소시민성에 대한 반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흙탕물을 튀기고 간 택시, 부주의하게 문을 여닫는 아내, 좋아하는 담배를 팔지 않는 가게 주인 등에 대한 끓음이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화자는 그러한 현실 속의 끓음열받음이 다소 넘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쑥스럽지도 않은 당당한(당연한, 자연스러운) 세상을 꿈꿉니다. 그 꿈은 4연에서 마음 놓고 끓어 넘치고 싶은 냄비 속의 맹물을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됩니다. 화자는 작은 것들은 물론, 큰 것들(호랑이, 구렁이)에 대해서도 마음 놓고 끓어 넘치는, 또 그렇게 한껏 끓어올라도 당당한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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