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661)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유채꽃5.jpg





나의 애독시(66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밤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나이가 든다는 건 사회에서 이제 개인으로 관심사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 동지를 구하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것 같던 친구가 어른이 되어서 이제 가족 걱정과 생계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중년의 얼굴로 나타났을 때, 정말 이젠 도전이 아닌, 적응도 아닌, 순응만 해야 하는 삶 속에서 비릿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소시민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체념의 씁쓸한 맛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요. 민주화와 자유 아니면 죽을 것 같던 그 스무 살의 정열은 이제 다시 묻지 않는 세월이 되었기에 적어도 속으론 심한 부끄럼을 느끼겠죠. 편안한 일상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유식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군요. 생각보다 널리 알려진 유명한 시로서 시인은 저의 고등학교의 선배님이 되시는 분이세요. ()





게시글이 어떠셨나요?



다른 이모티콘을 한번 더 클릭하시면 수정됩니다.

2,984개의 글

글 번호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
2984서건석06:112
2983서건석26.04.217
2982모하비26.04.2018
2981서건석26.04.208
2980서건석26.04.1916
2979서건석26.04.1816
2978서건석26.04.1727
2977서건석26.04.1623
2976서건석26.04.1519
2975서건석26.04.1417
2974모하비26.04.1341
2973서건석26.04.1319
2972서건석26.04.1217
2971서건석26.04.1126
2970서건석26.04.1020
2969서건석26.04.0921
2968서건석26.04.0826
2967서건석26.04.0724
2966모하비26.04.0633
2965서건석26.04.0620
2964서건석26.04.0527
2963서건석26.04.0426
2962서건석26.04.0322
2961서건석26.04.0225
2960서건석26.04.0131
2959서건석26.03.3130
2958모하비26.03.3045
2957서건석26.03.3022
2956서건석26.03.2927
2955편영범26.03.2850
2954서건석26.03.2828
2953서건석26.03.2729
2952서건석26.03.2645
2951서건석26.03.2536
2950서건석26.03.2436
2949모하비26.03.2346
2948서건석26.03.2324
2947서건석26.03.2234
2946서건석26.03.2120
2945서건석26.03.2033
2944서건석26.03.1929
2943서건석26.03.1823
2942서건석26.03.1736
2941서건석26.03.1633
2940서건석26.03.1525
2939서건석26.03.1431
2938서건석26.03.1339
2937모하비26.03.1257
2936서건석26.03.1229
2935서건석26.03.1128
2934서건석26.03.1034
2933서건석26.03.0934
2932서건석26.03.0828
2931서건석26.03.0728
2930서건석26.03.0635
2929서건석26.03.0531
2928서건석26.03.0427
2927서건석26.03.0341
2926서건석26.03.0227
2925서건석26.03.0134
2924서건석26.03.0132
2923서건석26.02.2839
2922서건석26.02.2832
2921편영범26.02.2845
2920편영범26.02.2859
2919서건석26.02.2560
2918서건석26.02.2444
2917서건석26.02.2330
2916모하비26.02.2254
2915서건석26.02.2234
2914서건석26.02.2130
2913서건석26.02.2032
2912서건석26.02.1931
2911서건석26.02.1833
2910서건석26.02.1746
2909모하비26.02.1649
2908서건석26.02.1651
2907서건석26.02.1531
2906서건석26.02.1447
2905서건석26.02.1335
2904서건석26.02.1243
2903서건석26.02.1153
2902서건석26.02.1045
2901모하비26.02.0968
2900서건석26.02.0966
2899서건석26.02.0835
2898서건석26.02.0747
2897서건석26.02.0637
2896서건석26.02.0543
2895서건석26.02.0436
2894서건석26.02.0345
2893모하비26.02.0272
2892서건석26.02.0246
2891서건석26.02.0145
2890편영범26.01.3170
2889편영범26.01.3177
2888서건석26.01.3133
2887서건석26.01.3042
2886서건석26.01.2942
2885서건석26.01.2850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