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553) : 새해 첫날의 엽서 / 이해인


2026년.jpg



나의 애독시(553)

 

 

새해 첫날의 엽서 / 이해인

 

새 달력에 찍혀 있는

새로운 날짜들이

일제히 웃으며 뛰어와

하얗게 꽃으로 피는 새해 첫날

 

묵은 달력을 떼어내는

나의 손이 새삼 부끄러운 것은

어제의 시간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 때문이네

 

나의 주변 정리는 아직도 미흡하고

어제 하던 일들의 마무리도 안했는데

불쑥 들어서는 손님처럼

다시 찾아오는 새해를, 친구여

우리는 그래도

망설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자

 

우리에게 늘 할 말이 많아

잠들지 못하는 바다처럼

오늘도 다시 깨어나라고

멈추지 말고 흘러야 한다고

새해는 파도를 철썩이며 오나보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함께 끌어안으며, 친구여

새해엔 우리 더욱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름다운 말을 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하자

우리의 모든 말들이 향기로워

잊혀지지 않는 시가 되게 하자

 

우리의 좁디좁은 마음엔

넓은 바다를 들여놓아

넓은 사랑이 출렁이게 하고

얕고 낮은 생각 속엔

깊은 샘을 들여놓아

깊은 지혜가 샘솟게 하자

 

이제 우리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해야 할

무겁고도 아름다운 멍에를

새해 선물로 받아 안자

 

--자꾸 밖으로 겉돌기 쉬운 마음

골방으로 들여놓고 자기 안을 보기

--바쁜 중에도 이웃을 향해

웃을 수 있는 여유 지니기

--자랑할 일 있어도 들뜨지 않고

겸허한 자유인이 되기

--어떤 작은 약속에도 깨어 있는

충실한 생활인이 되기

 

새해라고 하여

이런저런 결심을 내세우는 것조차

부끄럽고 부끄럽지만, 친구여

우리가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한다면

이 세상 모든 이가 형제라고 할 만큼

서로를 더 많이 아끼고 위해 준다면

우리의 새해는 기쁨의 춤을 추겠지?

꽃 속에 감추어져 있는 꽃술들의

그 미세한 떨림과 움직임의 순간처럼

우리가 진정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읽어내고 소중히 여기는

고운 감각을 지닌다면

우리는 더욱 행복한

새해의 새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흰 눈 속의 동백꽃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희망 찬 새해의 연인이 되자,

친구여.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어제와 첫날인 오늘을 모두 이해인 수녀님의 시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시에 대해선 아직도 과문(寡聞)한 탓에 때에 맞는 이보다 더 좋은 시를 발견하기 못했기 때문에 그리 되었습니다요. 읽으면 그대로 알 수 있는 내용이기에 시답잖은 해설은 보태지 않으려고 합니다. 불쑥 들어서는 손님처럼 찾아온 새해에도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무엇보다 건강함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라고, 새로운 마음으로 즐거운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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