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536)

♬ 눈 / 이가림

너는

스러지기 위해

잠시 땅 위에 내리는 눈

알 수 없는 바람결에 왔다가

때 묻은 이름으로 불리기 전

먼 부재(不在)의 기슭으로 떠나가는

새

너의 슬픔은 너무 가벼워

살아 있는 자의 가슴에

더욱 오래 머무르는 그림자를 남긴다

드높은 창공에까지 날아오르지 못한 채

나 사는 지붕 위를

한없이 맴돌고만 있는

둥지 없는 혼

너는 스러지기 위해

잠시 땅 위에 내리는 눈

◑ ‘너는 스러지기 위해 잠시 땅 위에 내리는 눈’이라면 ‘나는 스러지기 위해 잠시 땅 위에 내려온 존재’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정말로 알 수 없는 바람결에 왔다가 제대로 이름다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전에 먼 부재(不在)의 장소로 떠나가는 존재가 아닐는지요? 너와 나의 기쁨과 슬픔은 타인의 가슴에 그리운 그림자로 남고, 지상에서 한없이 맴돌던 우리는 결국 천상에서도 둥지 없이 맴도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눈(雪)처럼. 푸근하게 내리는 눈을 보며 푸근하지 못한 생각을 말씀드려 여간 죄송한 게 아니구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