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534)

♬ 치한(治寒) / 고영민

날이 추워지면서 출퇴근길,

붐비는 지하철 안

사람 몸 닿는 것이 좋다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다

내 가장 따뜻한 곳을

너의 가장 차가운 곳에 댄 채

더욱 밀착한 채

몸이 훌쩍이는 소리

내내 비좁아 뒤척이는

소리 듣는다

생전 모르는 너와

몸이 맞닿은 오늘

너는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밀쳐내지만

나는 더 너에게 다가가

밀착하여 너의 엉덩이,

등과 어깨를 느낀다

내 몸 나도 모르게

불끈, 뜨거워지는 역과 역 사이

그리고 네 몸 함께 덥혀지는

컴컴한 땅 속

나는 너에게 가만히 기댄 채

개찰된 하루

또, 환하게 너를 통과한다

◑ 먼저 제목의 한자어부터 잘 보시지요. 여자를 희롱하는 추잡한 사내라는 뜻인 치한(癡漢)이 아닙니다. 추위를 다스리는 법을 뜻하는 이 제목은 만원의 지하철 안에서 그 힌트를 얻은 듯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몸 닿는 것이 좋다 /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다 / 내 가장 따뜻한 곳을 / 너의 가장 차가운 곳에 댄 채’라는 구절에 이르면 그대로 癡漢의 심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너는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 밀쳐내지만 / 나는 더 너에게 다가가 / 밀착하여 너의 엉덩이, / 등과 어깨를 느낀다 / 내 몸 나도 모르게 / 불끈, 뜨거워지는 역과 역 사이’에 이르면 영락없는 치한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 완전히 낯모르는 사람과 서로 맞대고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요. 더구나 여자와 맞대고 있을 때의 어색함과 거북함이란 보통 불편한 게 아니지요. 그 상황을 즐긴다면 그건 틀림없는 치한(癡漢)일 겁니다. 가만히 보면 시인의 治寒도 완전히 癡漢 급의 경지에 이르렀지요. 하지만 온정을 서로 따뜻하게 나누지 못하는 삶에 대한 반동으로 이런 치한적(癡漢的)인 행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지탄받아야 할 성추행에 해당되겠는지요?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