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511) : 은행나무 / 곽재구

은행잎4.jpg



나의 애독시(511)

 

은행나무 / 곽재구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 이 시는 '나의 애독시(170)'으로 24년 12월 14일에 게재했던 시인데, 어제 동창들과 같이 노란 은행잎 떨어져 쌓인 현충원의 솔내길을 걷고 나니, 이 시가 떠올려 다시 올리는 겁니다. 이 시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는 화자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어요. 이 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보도 위를 걸어가다 아름다운 은행나무에 넋이 빠져 바라보던 화자는 은행나무를 의인화하여 라고 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바라보는 너, 즉 은행나무의 모습은 노란 은행잎들을 우산깃 같은 모습으로 무수히 달려 있고 몇 개의 도롱이집들도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은행나무의 모습은 화자로 하여금 추억에 물들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라는 자연물을 인격화시키고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활용하여 인간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화자는 지금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그 모습을 지켜 나가고 있기에 화자는 여기에서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자연물이 인간에게 삶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군요. ()

 

아름다운 시이지요. 이미 모두 낙엽이 되어 떨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저 은행나무 아래를 걷고 있노라면 자못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저 은행나무는 그리고 저 낙엽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봄비를 마중 나가던 그 여리고 환한 새싹들의 수줍은 마음을, 세상에 태어나 그 새싹들을 처음 발견하곤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던 꼬마의 설렘을, 여름이 오던 그 밤 첫 키스를 나누던 연인의 아찔한 눈길들을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요. 어젯밤 살짝 술 취한 아버지가 코트 속으로 붕어빵을 꼬옥 품다가 하나 꺼내 먹은 일도 실은 알고 있을 것이고, 그 서너 시간 전에 원 플러스 원들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낑낑 안고 가던 그의 아내의 노곤한 미소도 슬며시 다 보았을 겁니다. 그런 사연들이 그런 사람들이 저 아래 소복소복 쌓여 서로 등을 쓸어 주고 덮어 주며 그렇게 도란도란 모여 살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니 말입니다, 이제는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이지 이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서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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