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27) :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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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27)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살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늦은 저녁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얼마 안 간 곳에서, 훅 끼쳐오는 향내에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어디에서 나는 향기인지 한번 알아 맞춰보시지요. 어느 집 담장 너머로 라일락 한 그루가 그 꽃을 만개한 채 서 있었습니다. 자주 지나치는 길이지만, 오늘밤 거기 라일락 나무가 있다는 걸 마치 처음으로 알았다는 듯이 쳐다봅니다. 짙은 라일락 향 때문에 얼른 지나치기가 아쉽습니다. 향내에 취해 잠시 발걸음을 늦춥니다.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라는 걸 아시죠? 첫사랑은 그렇게 향기가 짙은가 봅니다. 지금 저의 마당에도 대여섯 가지 봄꽃들이 한창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화사한 햇빛이 그 꽃들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화창한 봄날이 그 햇빛 속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첫사랑은 언제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대개는 불분명하지요. 사랑은 호르몬에 의한 일시적 정신이상 상태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첫사랑은 정신질환의 첫 증세에 해당합니다. 일시적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상태가 첫사랑이라니, 그 우연과 허망이 평생을 질질 끌고 가다니, 추억하거나 기억되거나, 그리워하거나 한숨짓거나, 어느 봄날 아롱대다가 꿈결에 빨려들기도 하는 것이 첫사랑의 질환입니다요. 그러나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 증세가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자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고 하지만 이내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지요.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오랜 기간 기억되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데요. 러시아의 심리학자인 자이가르닉이 발표한 이론인데,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경우 계속해서 머릿속에선 찝찝하게 남아 있게 되고, 그때 남아 있는 일을 마치려고 하는 동기가 작용하기 때문에 기억을 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현상을 자이가르닉 효과인 것이지요.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도 그 의 엄청난 설렘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오래오래 기억 속에서 머물게 되겠지요. 딱히 첫사랑뿐 아니라 모든 옛사랑을 망라하여 더 애틋하고 미련이 남아 진하게 환기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날씨가 풀려 풀잎의 바람 위 반짝이는 소리가 들리면 창문 넘어 어렴풋이옛 생각도 나는 법이겠지요. 다만 찬바람 물러가고 아지랑이와 함께 봄기운이 오를 때면, 그의 눈동자와 맨발과 그의 맨발이 밟은 풀잎과 풀잎의 바람과 풀잎의 바람 위 아침 햇빛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가끔 그 첫사랑이 다시 맨발로 강중강중 다가오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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