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필(662)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일까, 억새일까? / 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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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필(662)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일까, 억새일까? / 유선경

 


인류의 최초의 악기 중에 피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피리는 갈대 줄기를 잘라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다의 님프 갈라테이아와 목신의 아들 아키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요. 그런데 갈라테이아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습니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였습니다. 아무리 구애해도 사랑받을 수 없었던 폴리페모스는 수백 개의 갈대를 잘라 만든 피리를 꺼내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수백 개의 갈대를 잘라 만든 피리라는 표현이 팬 플루트를 연상시키지요. 하지만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노래를 불러도 사랑받지 못해 생긴 분노를 진정시킬 수 없었던가 봅니다. 폴리페모스는 언덕을 뜯어서 아키스에게 던져 죽이고 맙니다. 하늘이 무너진 갈라테이아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신이시여, 아키스를 강으로 만들고 저를 갈대로 만들어 그의 곁을 영원히 지키게 해주세요.’ 신은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갈대가 억새와 달리 물가에서 나는 이유입니다.


갈대가 최초의 피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디에 굵은 줄기가 바로 서고, 줄기 가운데가 빈 덕분이었습니다. 갈대라는 이름도 대나무와 유사한 풀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대나무처럼 갈대도, 바람 부는 날에 쉽게 휘청거립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이 <팡세>에 쓴 유명한 글귀입니다. 앞줄에 나오는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는 성경에 나오는 부러진 갈대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이사야 423절에 나오는 이 구절은 바빌론에 끌려가 고통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구세주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더 강한 자에게 붙잡혀가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덫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부러진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란 그처럼 비참하고 힘없는, 부러진 갈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태생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정말 갈대를 보고 갈대라고 했을까요? 혹시 억새를 갈대라고 한 건 아닐까요?


파스칼이 살았던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은 프랑스 중남부 산악지대라서 갈대보다 억새를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와 달리 억새는 사는 곳을 가리지 않지요. 석양이 지는 가을 들판에서 바람이 불 적마다 온몸으로 오소소~’ 하고 울며 우윳빛 물결로 출렁이는 억새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이 우윳빛 물결을 두고 흔히 억새꽃이 한창이라고 말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꽃이 아니라 이삭입니다. 억새는 벼나 보리와 같은 벼목과 식물이니까요.


억새의 이삭은 처음에는 자줏빛이었다가 우윳빛으로 변하고 날개처럼 줄기의 옆에서 납니다. 그래서 이삭이 핀 후에 억새는, 이삭이 핀 후에도 꼿꼿이 서 있는 갈대와 달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사색에 잠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바람이 볼 때마다 몸을 흔들며 이삭에 매달린 씨앗을 멀리멀리 흩날립니다.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자 동시에 위대한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갈대여도, 혹은 억새여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주변에서 갈대보다 억새를 더 쉽게 볼 수 있다면 억새를 떠올려도 좋다는 뜻입니다. 가을이 되면 억새에 깃털처럼 이삭이 패고, 바람이 불 적마다 부대끼며 흔들리고, 흐느끼고, 흩날립니다. 마음까지 붙들어 흔들고 상념들을 흩날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날이면 이 구절을 떠올리며 힘을 내봐도 좋겠지요.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억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억새이다. <문득, 묻다(유선경), 지식너머(2016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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