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녹화 비화 27: 지역공동체의 모범 사례: 충북 음성군 사곡리 산림계
- 이경준
- 2025.01.1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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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녹화 비화 27)
지역공동체의 모범 사례: 충북 음성군 사곡리 산림계
산림조합과 산림계(山林契)는 과거 정부 주도의 치산녹화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과정에서 민관협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민초 조림’의 기반이었던 산림계는 관련된 기록물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 그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사곡리 산림계는 42년간 봉사한 성운경(成運慶) 산림계장이 모든 기록물을 잘 보관하였으며, 2008년 “산림60년사”라는 책을 발행하여 그 역할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충북 음성군(陰城郡) 감곡면(甘谷面) 사곡리(沙谷里)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남쪽으로 1.5km 지점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임야면적(684ha)이 전체면적의 84%를 차지하고 있어 산이 많은 강원도에 버금간다. 가구 수는 93호(인구 218명)로 1농가당 평균경작면적이 1.44ha (4,320평)이다. 대부분 농민이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으며, 이는 농가 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들의 강력한 산림정책으로 나무 한 그루조차 마음대로 벨 수 없었으며, 낙엽채취도 허용되지 않아 사곡리는 울창한 숲을 유지했다. 해방과 6.25 전쟁의 혼란기에 이 마을에는 도벌꾼이 몰려들었다. 사유림은 산주가 이들의 출입을 막아 어느 정도 보호가 되었지만, 372ha의 국공유림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인근 마을 혹은 심지어는 장호원에서 도벌꾼들이 하루에 200명 이상 몰려와 나무뿌리까지 마구 뽑아가서 완전히 민둥산으로 변해 버렸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1951년 ‘산림보호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마을별로 자체적으로 산림을 보호할 수 있는 산림계를 조성하도록 권장했으며, 산림계에 공법인(公法人)의 지위를 부여했다. 당시 국공유림 중에는 전국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는 것이 많았는데, 정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산림계가 국유림을 대신 보호하는 수단을 도입했으며, 이를 ‘국유림 대부제도’라고 부른다. 즉, 마을 사람들이 국유림에 조림하고 잘 관리하면 후에 이를 무상으로 양여하는 제도였다. 1958년 국유림 대부제도가 발표되자 전국적으로 산림계가 활성화되었다. 사곡리도 1959년에 산림계를 창설했으며, 산 57번지(100ha)에 대해서 10년간 국유림 대부허가를 받았다.
사곡리 산림계는 1966년에 대부 국유림 10ha를 대상으로 조림했다. 봄철 열흘 동안 리기다소나무와 낙엽송을 심고, 후에 풀베기와 비료주기도 실시했다. 1968년에는 30ha에 리기다소나무를, 1970년에는 40ha에 리기다소나무와 산오리나무를 연료용으로 조림했다. 1972년에는 당초 오향리에 대부 허가되었으나 관리부실로 대부가 취소된 산 49번지 국유림에 같은 수종을 심었다.
1969년에는 음성군 군유림(40ha)을 대상으로 분수림(分收林) 계약을 맺고 연인원 1,152명을 동원하여 낙엽송 104,000본과 리기다소나무를 심었다. 수익분배 비율은 산림계가 7할이었다. 1971년에는 음성군 산림조합림(90ha)을 대상으로 분수 계약을 맺고 30ha에 리기다소나무, 산오리나무, 아까시나무를 심었다. 위와 같이 산림계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235ha의 대부림 중에서 182ha에 6회에 걸쳐서 연인원 4,430명을 동원하여 총 536,000본의 나무를 심었다. 이러한 숫자는 당시 전국의 ‘우수 산림계’가 조림한 평균 117ha와 32만 본보다 더 많다.
성운경 산림계장은 1970년대의 조림에 얽힌 애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3월 중순이면 벌써 묘목이 마을에 도착한다. 농번기에 산림계원을 동원하는 것이 항상 송구스러웠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은 묘목을 운반하는 일이다. 그 당시에는 길이 없어 지게에다 짊어지고 마을 입구에서 산꼭대기까지 운반해야만 했다.”
사곡리 산림계는 조림도 열심히 했지만, 조림지의 사후 관리도 순산제도를 도입하여 철저히 수행했다. 2인 1조로 편성하여 매일 순번제로 순찰을 했는데, 인수인계는 ‘애림녹화’라고 새긴 완장과 기를 넘겨주고 받는 것이었다. 동참하지 못하는 경우 대신 호당 백미 1말 씩 순산원 보수로 내놓기로 했으며, 화전지에 대하여 임대료를 부여했으며, 이 재원으로 백미 5가마를 순산원 보수로 지급했다.
1970년대에는 솔잎혹파리와 솔나방(송충이)이 기승을 부렸던 시절이었다. 산림계는 1966년과 1967년에 송충이 구제작업을 했으며, 1972년에도 당시 4-H회원 11명과 마을개발위원 12명을 동원하여 정부에서 지원하는 마라치온 농약으로 구충작업을 했다. 가지치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연차적으로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풀베기작업과 함께 실시했다.
사곡리는 1944년에 대홍수로 산사태가 심하게 발생했는데, 1970년대까지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80년 충북사방관리소는 사곡리의 사방사업을 1천만 원으로 마을에 도급을 주었다. 계원들을 동원하여 사업을 마치고 정산을 해 보니 230여만 원의 흑자를 냈다. 이 수익금으로 사곡2리 문화회관 터(357평)를 구입했다. 1980년대에는 대부 국유림과 군 분수림에 대한 솎아베기(간벌)를 실시하여 800만 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전액을 산림계와 새마을사업 기금으로 적립했다.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많은 산림계가 대부 국유림 양여를 신청했으며, 일부 산림계는 국유림을 무상으로 양여 받았다. 그러나 1980년 제정된 국유재산법에 양여를 이미 약속한 경우라도 이를 불가토록 규정한 것을 근거로 하여 산림청은 국유림 무상 양여를 추가로 허가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웠다. 사곡리 산림계는 1959년부터 1982년까지 23년 동안 국유림 87ha에 26만 주의 묘목을 심고 가꾸는 데 연인원 3,000명을 동원했으나, 모든 희망(재산 증식)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할 수 없이 사곡리는 입목을 개인 목상(木商)에게 7,000만 원에 매도했다. 결국 대부국유림의 입목을 매각(포기)함으로서 대부국유림은 반지(返地)된 셈이다. 이어서 음성군 산림조합 위탁분수림도 6,500만 원에 매도했다. 당초의 분수비율은 3:7(산림계 7)이었지만, 최종적으로 5:5로 나누기로 합의했으며, 결국 3,250만 원의 수익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국유림과 위탁분수림이 모두 소멸되었다.
위와 같이 2001년에 총 1억250만 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지난 30여 년간 억척같이 나무를 심고 산을 지킨 대가치고는 너무 미흡한 소득이었다. 대의원총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했는데, 모두 계원별로 분배하자는 안이 채택되어 계원당 160만 원씩 분배하게 되었다.
사곡리 산림계는 1959년부터 50만 본 이상의 나무를 식재하고, 이 산림을 정성껏 그리고 모범적으로 가꾸어 왔다.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사곡리 산림계는 산림조합중앙회장의 ‘우수산림계 표창’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산림청장의 산림계장 개인의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에는 군유림 벌채사업(대부분 낙엽송림)으로 2억1,700만 원의 순소득을 올렸다. 2010년 산림계가 해산될 때까지 많은 임업 소득을 얻어서 8회에 걸쳐서 총 3억1,530만 원의 환원사업(수익을 계원과 마을에 배당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계원 1인당 493만 원씩 배당했으며, 마을 발전기금으로 총 4,500만 원을, 노인회 발전기금으로 1천만 원을 기부했다. 위와 같이 3억 원이 넘는 환원사업은 작은 산림계로서 극히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모든 수익이 조림, 육림, 벌채를 통한 산림녹화에 직결된 조림 소득이라는 점에서 사곡리 산림계는 국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산림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성 계장은 1938년생으로서 1962년부터 사곡리 산림계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정식으로 산림계장으로 선임되어 2010년까지 42년간 사곡리 산림계를 위해서 봉사했다. 필자는 성 계장을 직접 면담한 적이 있다. 성 계장의 탁월한 지도력과 철저한 사명감이 돋보이고, 애향심이 돈독하며, 청렴하면서 낮은 자세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마음과 따뜻하고 보듬는 인간애로 존경을 받음으로써 계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성 계장의 솔선수범하는 희생정신도 눈에 띈다. 마을 진입로가 없어 고민할 때 제일 먼저 자신의 토지(600평)를 희사하고, 다른 주민들의 기부를 독려했다. 어떤 경우에는 계장의 개인 출연금(쌀 15말)으로 생재기 땅을 받아내어 도로를 개설했다.
성 계장은 1959년부터 2010년 해산할 때까지 모든 행사를 기록으로 남겨 철저하게 보관했다. 정관, 회원명부, 회의록, 조림과 육림 기록, 재무관리 기록, 국유림 무상 양여 탄원서, 수익 배당(환원사업) 내역, 해산 관련 기록 등이 모두 남아 있다.
즉, 사곡리 산림계는 지역공동체를 자치적으로 결성하여 규약을 만들어 이를 민주적으로 준수하고, 산림자원을 조성하고 보호하면서, 이로부터 많은 소득을 창출했다. 특히 정부가 주도한 치산녹화사업에서 민관협력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여 국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산림계 중의 하나라고 칭송할만 하다.
사진 1. 대부 국유림 조림 장면. 1966. 3. 19.
사진 2. 국유임야 대부기간 연기 허가증. 충청북도지사. 1977. 5. 27.
사진 3. 사곡리 산림계 산림조합중앙회장 표창장. 1986. 12. 5.
사진 4. 산림계 해산 당시 임원과 산림계 건물. 2010.
사진 5. 성운경 산림계장 근영.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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