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녹화 비화 26: 황폐지 복구: 세계를 놀라게 한 사방사업
- 이경준
- 2024.12.1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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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녹화 비화 26.
이경준
황폐지 복구: 세계를 놀라게 한 사방사업
한국의 산림은 19세기부터 처참할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인구 증가에 따른 목재와 연료 수요를 산림이 감당하지 못했고, 정부는 기술이 부족하여 조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방과 6.25 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1950년대 중반 전국 산의 58%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으로 변했다. 낙엽은 산림 토양의 침식을 막아주는 마지막 보루인데, 낙엽까지 박박 긁어가서 풀 한 포기 없는 토양이 폭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장마철마다 산사태와 흙더미가 논밭을 뒤덮어 농사를 망쳤다.
황폐한 산에서 토양 침식과 유실을 방지하는 작업을 사방(砂防)사업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907년 서울 인왕산 자락의 백운동(창의문 근처)에서 처음으로 사방사업이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사방사업을 실시했지만, 지속적인 도남벌로 황폐지가 더 늘어나는 상황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사방사업의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1962년 1월 군사정부는 ‘사방사업법’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사방사업을 시작했다. 가장 가시적인 효과를 본 지역으로 외동 지구 사방사업을 들 수 있다. 외동 지구는 울산항으로 흐르는 태화강의 상류로서 동대산 서쪽에 있으며, 산사태가 날 경우 울산공업단지를 위협하는 곳이었다. 동대산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화강암이 풍화하여 모래토양으로 되어 있어 쉽게 씻겨나가 오랫동안 황폐지로 남아있었으며, 그 면적이 500ha에 달했다. 1966년까지 수차례 걸쳐서 사방공사를 실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67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공업단지를 시찰하고 가차로 귀경하다가 월성군 입실역 근처의 황폐지를 직접 보고 난 후, 양택식(梁鐸植) 도지사에게 친필로
“원래 산의 경사가 급하고 암석지대이므로 보통 방법으로는 사방을 하더라도 강우 시에 유실되고 초목의 활착이 잘 안 되는 지형이므로 특수공법의 기술력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저 형편 없던 산이 저렇게 훌륭하게 사방이 잘 되었구나.’ 라는 소리가 나오게끔 연내에라도 착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라고 소상히 적어 보냈다.
그해 9월부터 도와 군은 말할 것도 없고, 군부대까지 참여하여 비장한 각오로 사방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 6월까지 500ha에 걸쳐서 기초공사, 종자 뿌리기, 기존 사방지와 하천 보수, 비료 주기 등을 실시했다. 특수사방공법을 적용하여 수평으로 단을 만들고, 좋은 흙을 외부에서 가져와 객토를 충분히 한 후 5년생 곰솔(해송)을 심어 조기녹화를 시도했다. 당시 동원된 인부는 하루에 1천-2천 명에 달했고, 기술지도를 맡은 공무원은 9개월 동안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주말조차 거의 귀가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반세기에 걸친 숙제가 해결되었다.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양택식 도지사(후에 서울시장 역임)의 열정이 빚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영일 지구 사방사업이다. 이곳은 3개 시군, 9개면, 115개 마을에 걸쳐서 총 107,408ha의 방대한 면적이 반사막처럼 황폐한 상태였다. 토양은 이암(泥岩)과 혈암(頁岩)으로 되어 있는 특수지역으로 풍화작용으로 바위와 돌이 힘없이 부서져 비가 오면 겉흙이 쉽게 씻겨나가고, 건조하면 단단해져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뜨거운 사막과 같이 되어 있었다. 1907년 우리나라에서 사방사업이 시작된 이래 무려 50여 차례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실시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후 하늘길이 열리고 동경을 출발한 서울행 여객기는 나무가 울창한 일본 영토를 지나 한국의 관문에 해당하는 영일-포항지구를 먼저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길에 이 지역을 보고 가슴 아파했던 곳이며, 당시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모든 국민과 심지어는 외국인까지도 이를 안타까워했다. 그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형산강 하상을 높여 영일만 일대가 퇴적 매몰되어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도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었다.
두 명의 전임 산림청장이 이 지역의 복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1973년 박 대통령은 기획능력이 특출한 손수익(孫守益) 경기도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지역을 반드시 녹화해 놓으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산림청은 포항사방관리소를 해체한 후 영일과 의창사방사업소를 신설하고, 38명의 기술지도원을 배치했으며, 이 지역을 20개 공구로 구획하여 지역별 책임제로 추진했다. 산허리를 둘러 콘크리트를 치고 파일을 박아 사면을 안정시켰다. 특히 경사가 아주 심한 곳에서는 특수 인부들이 한 가닥 산악용 자일에 몸을 매단 채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목숨을 걸 정도의 사명감 없이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공사였다. 자동차 도로가 없는 곳이라서 먼 거리에서 돌과 좋은 흙을 지게로 날라와야 했다. 당시 구자춘(具滋春), 김수학(金壽鶴) 두 도지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1975년 4월 박 대통령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 영일군 흥해읍 오도리를 다시 찾았다. 지프차를 타고 노폭이 3m 밖에 안되는 좁고 위험한 비포장도로를 기다시피 달려 산정상까지 갔다. 박 대통령은
“계곡에는 낙차공을 더 많이 설치하고, 등고선에 따라 구덩이를 더 깊게 파서 좋은 흙을 넣은 다음에 나무가 꼭 살 수 있도록 심으라.”
고 당부한 후 금일봉을 하사했다. 이곳에는 대통령 순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드디어 1977년 5월, 4년에 걸친 작업 끝에 4,538ha의 영일 지구 황폐지가 완전히 녹화되었다. 묘목 2,389만 본, 종자 101톤, 비료 4,161톤, 떼 2,241만 매, 석재 230만 점, 토비 및 객토 210만 톤, 총 연인원 355만 명, 그리고 예산 38억 원이 투입된 대역사였다. 경상북도는 이 위대한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흥해읍 용천마을에 ‘영일 사방준공기념비’를 세웠으며, 2007년에는 포항시 흥해읍 오도마을 일원에 사방역사관, 교육관, 체험장을 갖춘 ‘사방기념공원’을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성공적인 영일 지구 사방사업은 국내에서 거의 잊힌 채로 있었는데, 일본 신문에 의해서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황폐지로 남아있던 영일 지구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 일본 기자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1984년 봄 아사히 신문 기자단이 찾아왔다. 산림청의 안내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일본 기자들은 골짜기를 이 잡듯 뒤지며 수십 미터 절벽이 녹화되어 있는 현장을 확인했다. 엄청난 물량의 돌이 투입되고, 산허리를 둘러 콘크리트를 치고 파일을 박아서 사면을 안정시킨 공법을 취재하면서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 후 아사히 신문은 녹색 물결이 넘치는 아름다운 영일 지구 사방 현장을 넓은 지면을 할애해서 컬러 화보로 자세하게 연재했다.
해방 이후에도 산림이 지속적으로 훼손되어 사방공사가 꼭 필요한 극심한 황폐지 면적(요사방지)은 1956년에 최고 68만6천ha에 달했다. 당시 한국의 산림면적이 총 669만ha였으니까 전체 산림면적의 약 10%가 사막과 같은 황폐지였다. 이 중에서 이승만 정부(1948-1960)가 총 19만ha, 박정희 정부(1961-1972)가 43.8만ha를 우선 복구하였다. 이어서 역사적인 제1차 및 2차 치산녹화10개년계획(1973-1987)을 세워 205만ha(49억 본)에 조림하고, 사방지 7.7만ha를 복구하여 민둥산과 황폐지를 모두 없앴다. 이듬해 1988년에는 올림픽을 유치하여 한국의 성공적인 산림녹화를 세계에 홍보할 수 있었다. 사방공법은 본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개발하였으나, 해방 이후 우리가 한국 실정에 맞는 새로운 공법을 꾸준히 개발하였으며, 지금도 산불 지역과 산사태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개발도상국임을 FAO가 1982년 확인해 준 바 있다. 이런 세계적인 기록은 정부가 장기간에 걸친 조림, 화전 정리, 사방사업, 연료림 조성 등의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철저하게 실행에 옮겼으며,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이에 동참함으로써 가능했다. 우리 한민족의 애국하는 마음과 근면과 협동 정신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다.
사진 19-1. 사방공사 연차별 효과 (을주군 1967년)
사진 19-2. 접근로가 없는 사방공사장의 열악한 환경에서 지게로 돌, 흙, 묘목, 비료를 운반했다.
사진 19-3. 경사도 70도 이상 위험한 곳의 영일지구 사방공사는 목숨을 걸고 자일에 의지해서 수행했다.
사진 19-4. 군새마을운동으로 육군 제3011부대 관모봉 주변 29ha에 풀떼공, 수로공, 파석공을 실시한 모습(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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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9-4. 군새마을운동으로 육군제3011부대 관모봉 주변 29ha에 풀떼공, 수로공, 파석공을 실시한 모습( 1974년).JPG(2.86 MB)다운로드 횟수 :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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