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24)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빗물.jpg



나의 애독시(24)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 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지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빗물 같은 정이라고 하니까 대뜸 푸근함과 넉넉함이 연상되지 않나요? 게다가 첫 연에서의 말하는 투와 그 내용은 우리가 항상 듣는 것이건만 그럴 듯한 새삼스러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가요?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 버린 사람이 요즘 몹시 신경 쓰게 만드나 봅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 내가 주는 빗물 같은 정을 두 손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 이르면 간곡한 사랑에 가슴 뭉클해집니다. 가로등 불빛을 배경으로 멋있게 서 있는 저 무심한 친구여, 지금 사방은 온통 봄인데 사랑의 꽃은 언제 피우려고 그러는가요? 이 답답하고도 무심한 이름 모르는 친구여!

 

 

덕수궁 주변 길에 촉촉히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에 모두 다 녹아버린 듯 노랗고 빨간색의 생기 잃은 잎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한기 가득 머금은 가을비는 행인들의 옷깃을 여미며 어깨 위 형형색색의 우산들을 나풀거리게 합니다. 서울 도심의 행인들은 늘 바삐 걷습니다. 실제 급한 일이 없더라도 습관이 된 듯합니다. 누굴 만나러, 어디로, 무엇 하러 가는지 모를 종종걸음만 무성할 뿐입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시절, 빌딩 숲을 에워싸듯 흩어진 낙엽에도 관심조차 주지 않습니다. 어쩌다 비라도 내리면 그제서야 마지못한 듯 걸음을 늦춥니다. 인생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지요. 세상살이가 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세상 모든 것, 어느 것 하나라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게 있을까요. 휴일 덕수궁 돌담길 산책은 여유롭군요. 우산을 받쳐 들어도 번거롭지 않습니다.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 빈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중략) /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지진 않으리라~’라는 시구가 저절로 떠오르는 산책길입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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