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857) :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11월.jpg


나의 애독시(857)

 

 

♬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 사람들마다 취향이 서로 다르니까 좋아하는 계절도 제각각 다 다릅니다. 시인이 좋아하는 계절인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는 시인 나름대로의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황토에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를 좋아하고, 거기에는 막걸리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아버지의 콧노래가 묻어 있고, 아버지가 들고 오는 선물 꾸러미를 기다리던 저녁 시간에 대한 추억이 새겨져 있고, 찐 고구마의 구수한 냄새가 배어 있으며, 솔직하고 청결하게 그리고 겸허히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을 시방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겠지요. 당신은 어느 계절 어느 때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지요?

 

◑ 『추수가 끝난 빈 들판, 로버트 오웰의 우수 어린 눈빛 같은 하늘, 조금은 수척해 보이지만 슬퍼 보이지 않는 이 가난한 11월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한 해가 다 가기까지는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얼마 남지 않은 저금통장의 잔고(殘高)를 아끼듯이 나는 나의 이 마지막 여유를 아끼고 싶다. …… 결핍 속에서 느끼는 충만감, 승리가 아니라 패배 뒤에 오는 안도감 같은 것,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느끼는 부드러운 우수와 쓸쓸한 해방감. 11월에는 언제나 그런 체념의 그림자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감의 기이한 빛이 서려 있다. 11월은 이미 흘러가 버린 일에 대하여 후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음을 알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펌) (손광성의 수필 ‘이 가난한 11월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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