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793) : 등나무 앞에서 / 김신용


등꽃.jpg



나의 애독시(793)

 

 

등나무 앞에서 / 김신용


 

집 뒤 공터에는

늙은 등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고요의 그늘 짙게 드리우고, 공터의 주인공처럼

서 있다. 한낮의 게으른 슬리퍼를 찍찍 끌며

그늘을 찾아들면, 몸 비틀어 뻗어올린 넝쿨로

그늘을 짓고 있는 모습이, 일생의 그늘 하나 짓지 못한

사람은 사절, 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 같다

마지막 힘 다 짜내 무거운 질통을 지고 있는 공사판의

늙은 인부 같기도 한 등나무 앞에 서면

부끄럽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등나무처럼

나 또한 마지막 나체가 되기 위해 선정적인 음률 따라

몸 비비 꼬는 스트립 걸처럼 살아왔다

창조적인 것,

남이 상상도 못할 기막힌 착상의

기상천외한 것, 그런 충격요법을 연기하기 위해

여의도 광장을 질주해 반짝이는 햇살의

바퀴들을 박살내는

그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의처럼 살아왔다

이제 마침표의 잎새들을 매달고 싶다

그럼 나는 잎새 하나의 그늘을 지었는가? 등나무처럼

지친 마음 쉬어갈 넉넉한 빈터를 드리웠는가?

문득 돌아보면 내 그림자, 손톱 같다

파리 한 마리라도 날개를 뜯지 않고서는 보내주지 않겠다고

날을 세운내 야윈 몸 하나 가리지 못하는초라한

넝마 같다. 한때 내 삶의 에너지였던

모독처럼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등나무 앞에 서면, 게으른 백 년은 노력한 하루만 못하다는 말이 생각나서 부끄럽고, 나무 한 그루가 이루어낸 세상이 한 나라와 같다는 말이 생각나서 또 부끄럽지요. 몸 비틀어 뻗어 올린 넝쿨로 그늘을 짓고 있는 늙은 등나무. 그 앞에 서면,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되지요. 상처 없는 영혼은 없고,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등나무. 등나무의 그늘처럼 나다운 그늘도 제대로 만들어 주지 못했고 마침표의 잎새 그늘지어 쉬어갈 넉넉한 쉼터도 제공하지 못해 초라한 넝마 같다는 느낌이 든다. 등나무도 때로는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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