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778) : 갈대는 배후가 없다 / 임영조


갈대숲.jpg



나의 애독시(778)

 

갈대는 배후가 없다 /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서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여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싱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대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는 눅눅한 습지에서 자라지만 볕 좋고 바람 서늘한 가을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릅니다. 갈대를 보면서 시인도 철이 들어 치기 어린 젊은 날을 돌이켜보며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우려고 합니다. 말리면 말릴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홀가분하고, 백발은 성성하지만, 허리 꼿꼿한 갈대와 같은 노후를 기대합니다. 갈대는 결코 주인공인 적이 없고 늘 뒤에서 배경 역할만 합니다. 하지만 결코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는 반골 기질이 있습니다. 항거할 때는 끼리끼리 의지하기도 하지만, 흩어질 때는 오갈 데 없어도 따로따로 떠납니다. 그만큼 자유로운 갈대를 보며 시인도 세속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속을 비우면 존재조차도 홀가분하게 버릴 수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아직 그리하지 못합니다. 그리할 수가 없습니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젊은 날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고 좀 더 오래 그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러나,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 저 꼿꼿한 老後의 갈대는 절대로 기억에서 지우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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