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776) : 귀뚜라미 / 황동규


귀뚜라미.jpg


나의 애독시(776)

 

 

귀뚜라미 / 황동규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꼍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 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이 시는 귀뚜라미가 베란다에서 다용도실로 이동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귀뚜라미의 눈에 비친 인간의 문명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시적 화자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들리던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다용도실에서 들리게 된 것을 의아해하다가 귀뚜라미의 이동 과정을 상상하게 되는군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주변을 살피고 한숨 자기도 하고, 음식 자국을 핥아 보는 귀뚜라미의 모습은 식구들이 모두 집을 나간 후 혼자 남겨진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는 노인일 수도 있고,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어떤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이 시는 귀뚜라미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생활상과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는지요.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가장 외진 공간으로잠적했으니 그의 소리가 없어지고 그의 존재가 사라지리라.

 

가을은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이지요. 10여 전까지만 해도 주택에서 살아본 나에게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가을날 오케스트라와 같은 느낌을 들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파트 생활하다 보니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까마득합니다. 오히려 어쩌다 귀뚜라미라도 나타날 양이면, 집사람은 기겁합니다. 집사람에게 귀뚜라미는 벌레인 것입니다. 귀뚜라미 역시 지금 같은 아파트라는 공간에서는 그의 노랫가락을 뽑아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자연과 함께하지 못하는 콘크리트 건물이 삭막하겠지요. 시는 귀뚜라미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 생활의 한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전혀 새롭게 느껴진다는 걸 알 수 있게 합니다. 귀뚜라미를 제재로 삼아 사회나 가족에게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뒤꼍 다용도실에서 들리는 힘없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모티프로 삼아서, 귀뚜라미가 TV로 상징된 현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면서 결국에는 가장 외진 공간을 거처로 삼게 되는 과정을 화자의 상상을 통해 제시한 후, 결국 생명력을 완전히 잃게 된 상태를 울음소리가 사라진 현상을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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