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774) : 꽃이 졌다는 편지 /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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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774)

 

 

꽃이 졌다는 편지 / 장석남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시를 읊조려 보면 꽃 진 나무 한 그루 앞에서 이렇게도 많은 상념이 떠오를 수 있나 싶습니다. ‘꽃이 졌네.’ 하고 지나쳐 버리면 그만인 일상이 시인이 머뭇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섬세하게 다시 피어납니다. 꽃 진 나무 앞에서 피어나는 가지각색의 사유와 무늬들. 요즘은 너나없이 상상력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일상적인 감성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 상상력은 꽃피지 못하죠. 무뎌진 마음을 총총한 사유와 상상력의 꽃밭으로 만드는 데 시만큼 좋은 친구는 없다고 봅니다. 꽃 피었거나 꽃 진 자리 앞에서 잊고 있던 추억이나 감수성을 살려 다양한 마음의 무늬를 새겨 지니는 일도 쓸 만한 일이 아니겠는지요. 얼른 꽃 진 자리 앞으로 가 보시지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추억이나 감수성을 살려 마음속으로 편지를 한번 써 보시지오. ()

 

​◑ 늘 당신 생각하면서 산다고 쓸 수는 없습니다. 혼자 걷는 길에 꽃이 피고 꽃이 피어난 자리에 또 한 계절 지나 열매가 맺는 것을 붙잡기에 급급합니다. 어느 날은 꽃과 내 생각과 언뜻 스치는 당신과의 기억들이 뒤섞여 몸만 무거운 채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벌써 가을이 깊고, 한바탕 호숫가 주위를 돌아내려 오던 꽃향기도 가라앉았다고 쓰다가 지웁니다. 꽃 진 자리 볼 때마다 우리 지난 이야기 생각난다고 쓰다가 얼른 지웁니다. 머지않아 첫눈이 녹아버린 길가에서나 문득 당신이 생각나겠다고 쓰려다가 머뭇거립니다. 나는 늘 한발 늦게 입이 열리고 한참 우리의 날이 지나간 뒤 그제야 편지를 끄적거립니다. 당신 앞에서 내 말은 저만치 가버린 뒤의 일일 뿐입니다. 꽃들은 다 져버리고 구름도 가고 바람에 잎도 다 떨어진 날의 기억입니다. 이러다가는 그대 생각 다 지워진 뒤에나 더듬거리며 몇 마디 고백할지도 모릅니다. 세월은 빠르고 그날 그 일들은 참 멀리도 가버리는군요. 전하지 못한 일이 분명히 있을 텐데, 오늘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봉합니다. 어제는 베란다 괭이밥이 늦게 노란 꽃 두어 송이 달았습니다. 간신히 그렇게 빼꼼 눈을 떴습니다. 며칠 궂은 날이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아껴 쓰고 싶은 햇빛이 방으로 들어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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