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697) : 화학 선생님 / 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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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시(697)

 

화학 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 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O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 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 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혀

그 점수가 영 믿기지 않았지만

백발 성성한 지금도 이 세상에는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걸

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즘 같았으면 이 선생님은 '점수 조작'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렀을 겁니다 시의 배경은 1950년대 말, 공정한 분배는커녕 정치적 부패가 극에 달했던 때입니다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라는 인식으로 사는 교사는 부조리한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지금은 모든 성과의 지표를 계량화하는 시대입니다. 점수는 성과를 객관화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소외시지요. 점수로 따지지 않는 따질 수도 없는 일들을 인문학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면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로 비춰지겠지요. ()

 

옛날을 회상해 보면 정양 시인이 중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당시만 해도 이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교사들에게 이만한 재량권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다고 60점을 100점으로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런 일을 했다면 선생님을 고발하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온 나라가 뒤숭숭할 것입니다. 수행 평가나 내신 평가 제도가 도입된 이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서로 믿지 못하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걸 점수나 숫자로 평가해야 하다 보니 획일적이고 경쟁적인 교육 현장은 낭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대학의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교양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선풍기를 켜 놓고 날린 후 가까이 떨어진 답안지는 A 학점, 멀리 날아간 답안지는 D 학점을 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 이제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전설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온통 점수로 학생을 평가하고 획일적인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지금의교육 현장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지금도’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것 / 나는 믿지 않을 수 없다라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 자체입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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