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678) : 봉숭아 / 도종환


봉숭아3.jpg





나의 애독시(678)

 

 

봉숭아 / 도종환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내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옛날 여자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아이인 우리도 가끔 봉숭아 꽃잎을 짓이겨 빻아 백반을 넣어 손톱 위에 얹어놓고 헝겊으로 처매고 잠자고 일어나면 발갛게 물들여진 손톱을 보았던 적을 기억하지요.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이렇게도 오래 지워지지 않는 사랑으로 남아있단 말이냐. 손끝마다 붉게 밴 그리움이 그 빛깔만으로도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있어야 하는 건지요. 담 밑에 한쪽에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서서 엷은 붉은 빛으로 고개 숙이고 있는 봉숭아가 열 손가락에 사랑의 붉은 흔적을 남기던, 그 순수하던 옛날의 모습을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도통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인공으로 만든 다양한 색깔의 매니큐어를 더 좋다고 하니 사뭇 발전된 현상인지 모르겠어요.

 

이 시는 봉숭아(물들이기)를 소재로 삼아 사랑과 그리움의 아픈 상처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적 화자는 봉숭아를 사랑의 대상인 너로 의인화하여 저문 여름날 뜨락에서 손톱에 봉숭아의 빨간 꽃물을 들였던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나와 너(봉숭아)가 서로 몸을 섞어 진한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라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 손가락 모두를 붉게 물들였던 봉숭아 꽃물은 시적 화자에게 단순한 봉숭아 꽃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시적 화자는 봉숭아를 보며 자신이 사랑했던 실제의 대상(& 연인)과 그와 관련된 과거의 슬픈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것은 시적 화자의 마음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쓰라린 상처의 흔적으로 남아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름철 손톱에 들인 봉숭아 물이 첫눈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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