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시(25) : 꽃피는 시절 / 이성복

벚꽃4.jpg



나의 애독시(25)

 

 

꽃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 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헤어지고 돌아서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헤어진단 말입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보낼 수가 없는 것이죠. 헤어진다는 건 실핏줄이 터지고 가죽이 갈가리 찢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은 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건 이별일 겁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어떤 어려움이나 권태가 찾아오더라도 그를 극복하고 질기게 붙어있어야 하지요. 진짜 사랑은 차마 헤어지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그럴 듯한 설명이 이 시를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여간 죄송치 않구만요.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당신이라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씌어졌지요. 그런데 이 둘이 어떤 존재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둘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밖에 없어요. 먼저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맸던 적이 있고, 흙더미와 관련된다는 내용을 통해 그것의 속성이 식물과 관련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것이라는 표현은 당신과 의 속성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주지요. 당신은 꽃(꽃잎)이고, ‘는 피어날 꽃을 품고 있는 껍질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렇게 당신의 속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몫을 합니다. 당신()이 피어날 때 는 몸뚱이가 갈가리 찢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는 당신이 오는 게 두렵고,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는 당신이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계절 변화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이 피어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경이롭지만, ‘가 당신을 위해 부서지고 무너지듯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지요. 이 시는 한마디로 꽃이 추운 땅속을 헤매다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라면 되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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