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나의 애독시(1148) : 저물 무렵 / 안도현
- 서건석
- 2020.07.06 05:57
- 조회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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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물 무렵 / 안도현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 누구에게나 막 처음 사랑에 눈뜨는 시절이 있지요. 그것이 열세 살이든 열다섯 살이든,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맞대던 시절. 뜨겁기는커녕 차갑기만 하던 그 아이의 입술, 부드럽기보다 바싹 메말라 적셔주고 싶기까지 했던 입술. 그 느낌이 화인처럼 남아 어린 청춘을 오래오래 달뜨게 만들던 시절이 있지요. 늦은 밤 가만히 골목을 내려와 그 아이가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수학 문제를 풀 것만 같은 이층방, 불 밝힌 창문을 달이 저만큼 기울 때까지 올려다보면 시절이 있습니다. 그 방의 불이 툭 하고 꺼지면 온 우주의 불빛이 꺼져버리고, 세상이 온통 깜깜해지는 아득함에 오래도록 고개를 떨어뜨리던 시절이 있지요. 시인은 붉게 물든 아름다운 노을을 통해 처음 사랑에 눈뜨는 곱디고운 마음을 ‘어린 노을’로 선명하게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노을이던 날의 사랑은 아름답지요. 저물 무렵 강둑에 나란히 앉아서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기만 하던 날들의 풋풋한 사랑. 그 애와 건너야 할 바다, 그 애와 살고 싶은 집,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가슴 따끔거리던 날들. 처음 입술을 포개던 날 들었던 여린 숨소리와 내 나이 젊었을 적 그녀에게서 느꼈던 숨소리를 오버랩시켜 보시지오. 나이 들어도 이런 환상이나 그리고 있으니 저는 주책도 보통 주책이 아닙니다그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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