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필(653) : 겨울 가로등 / 정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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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필(653) : 겨울 가로등 / 정태헌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 어둠 속 사위는 적요하다. 인적조차 끊긴 한길가를 홀로 걷는다. 눈 속 저편의 은은한 한 풍경이 내 눈길을 끌어 붙든다. 얼어붙은 추위 속에 앙상한 나목은 하늘을 향해 묵도하고 있고 가로등은 목을 반쯤 기울여 나목에게 따스한 불빛을 내어주고 있다. 그 불빛 타고 부나비 떼처럼 날아오르는 하얀 눈송이들. 문득 눈송이보다 더 하얗던 눈빛 하나 떠오른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호스피스 병실에 있던 그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발병하기 전에는 낙천적이고 낭만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끌며 즐겁게 하던 사람. 그는 남의 기쁨과 슬픔을 제 것처럼 여기며 이웃에게 봉사하고 선행을 베푸는 데 아낌이 없었다.

병치레 한 번 심하게 하지 않던 그가 어느 날 암 선고를 받았다.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문제없이 이겨낼 수 있다며 평소 성격대로 의연한 태도를 보이질 않았던가. 한데 날이 가도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없이 점점 깊어져만 갔다. 그래도 담담한 모습을 잃지 않았기에 보기에는 죽음을 선고받고 나서 삶을 깨친 사람처럼 보였다.


겨우 불혹을 넘긴 나이, 한데 언제 숨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죽음을 목전에 둔 그의 눈빛은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예전의 당당한 모습은 간 데 없고 꺼져가는 퀭한 눈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신의 그림자. 죽음이 닥쳐왔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는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움찔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뱉어낼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삭정이 같은 육신은 삭아내려 버렸고 눈빛마저도 아득할 뿐이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부대끼며 산 처지인데도 그날따라 그는 왠지 낯선 사람만 같았다. 아니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내가 그에겐 이미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그날부터 한 걸음씩 죽어간다지만 그는 그야말로 절박한 죽음의 벼랑에 서 있었다. 곧 떨어져야 할 저편,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 속은 울음빛이 그렁그렁했다.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을 피하여 병실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숨을 몰아쉬며 문밖에서 서성대기를 삼십여 분, 그의 방에선 울음이 터져 나오고 난 병실 복도에 얼어붙은 채 못 박히고 말았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자책의 싸늘함. 가슴속은 무언가가 쑤욱 빠져나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순간에 그리 아득히 가는 것을 그 눈빛 하나 안아주지 못하다니. 그 눈빛 끝내 지켜주지 못한 것은 그의 죽음보다는 미구에 나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올 단절과 상실감 때문이었으리라.


그 후, 가버린 그 사람에게 늘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죽어가는 그의 공허한 눈에 다순 눈빛을 섞어 끝가지 다독여 주었더라면.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지 못했던 게 지금은 가슴에 회한의 맷돌이 되어 무겁게 얹혀 있다.


겨울이 되면 나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 다 털어내고 핏줄이 보이는 나목으로 서는 일이다. 나목은 치장과 허위를 벗고 또 다른 진실과 희망을 잉태하여 새순으로 피어날 봄을 기다린다.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되고 열매는 인간의 손아귀에 쥐어져도 나목은 애오라지 섭리에 맡길 뿐이다.


그 섭리의 계단에서 만나는 가로등 불빛이 강파른 이 겨울을 벌거벗은 채 나야 하는 저 나무에겐 얼마나 큰 위로이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화단의 마른 나뭇가지에 말라비틀어진 검붉은 열매 하나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 그 위로 눈송이는 하냥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 작은 풍경이 발길을 붙든다. 눈을 들어 저편 풍경을 다시 쳐다본다. 맷돌이 가슴을 짓누른다. 과연 나는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저 가로등이 되어 준 적이 있었던가.


그의 마지막 눈길이 생각날 때마다 세상을 향해 지녀야 할 눈빛을 생각하곤 한다. 잘못을 부끄러워하되 회심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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