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오늘의 수필(646) : 낙엽을 밟으며 봄을 꿈꾼다 / 문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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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필(646) : 낙엽을 밟으며 봄을 꿈꾼다 / 문순태

 


내 우거(寓居)가 있는 생오지로 가는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이 명징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하루하루 빛깔이 변화해가는 자연을 보면서 세월의 간극을 생각하게 된다. 고서에서 광주댐을 거쳐 소쇄원을 지나고 유둔재 터널을 뚫고 무등산 뒷자락 끝에 자리 잡은 생오지로 가는 길은 사계절의 변화가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서에서 광주댐에 이르는 도로변 메타세쿼이아의 바늘 같은 가로수 잎이 쇠털 색으로 물들어, 저 색으로 스웨터를 짜 입으면 참 따뜻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서리가 내린 뒤부터 낙엽이 되어 불불 날리기 시작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의 마음을 푸르고 따뜻하게 해주었던 메타세쿼이아도 이제 미련 없이 잎을 떨어뜨리고 긴 겨울 앙상한 모습으로 설한풍에 시달리게 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오싹 움츠러든다.


   시골에 살다 보면 세월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진다. 세월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은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하루는 얼마나 지루하고 견디기 어렵겠는가. 그러기에 세월이 빠르다고 탄식하는 것은 행복에 겨워서 하는 말이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답답해서 시골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한다. 그것은 시골살이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이다.



   비록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에서 살자면 한시도 편할 때가 없다. 채소 가꾸어 먹으랴, 개와 닭 사료 먹이랴, 풀 뽑으랴, 감 따랴 잠시도 한가할 때가 없다. 거기다가 하루가 다르게 색깔이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고 살자면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칼 사이로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시간 속의 시간을 사는 것 같다. 봄비 촉촉하게 내릴 때 모종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마당에 말리는 가을이라니.


   우리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봄이 청소년기라면 여름은 청년기이고 가을은 중·장년기에 해당하며 겨울은 노년기다. 계절은 각기 저마다의 색깔과 눈부신 아름다움과 함께 인간에게 삶의 진정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는 호기심의 대상인 세상에 대해 다 알고 싶고 청년기에는 두려움 없는 용기로 무엇에든 도전으로 하고 싶으며, ·장년기에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성공이라는 인생 목적지를 향해 줄달음치고 노년기에는 비로소 숨을 고르고 자신이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게 마련이다.


   낙엽이 소슬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니 문득 지난날들이 그리워진다. 가을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껏 날마다 무등산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참 단출한 한평생이다. 깊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무등산 뒤꼭지를 바라보며 산 너머 세상을 동경하고 살다가, 6·25를 만나 총알 사이를 뚫고 광주로 나왔다. 광주에 살면서는 다시 무등산 너머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은 인간과 달리 앞뒤가 없고 묵묵히 시간의 법칙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뒤가 다르지 않고 순환의 법칙이 분명한 것은 영원불멸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무등산의 이쪽과 저쪽 세상의 차이는 실로 엄청났다. 이쪽이 욕망과 경쟁과 변화를 추구하는 세상이라면 저쪽은 정체와 무욕, 소외와 궁핍의 땅이 분명했다. 이쪽 사람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았고 저쪽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옛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느리게 살았다. 나는 경쟁과 변화 속에서 빠르게 사는 것만이 미래 지향적이고, 정체와 소외와 궁핍 속에서 느리게 사는 것은 과거 지향적이며 퇴영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겨울에 진입하고 있는 나는 지금 과거와 미래의 중간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어쩐지 삶이 삭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져 내 자신이 추사의 세한도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내 마음이 앙상한 나목처럼 깡말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세한도는 결코 겨울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다시 올 봄을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쓸쓸하고 적막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따뜻한 생명의 계절이 다시 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화려한 유채색의 공간에서 한갓진 무채색의 고향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똑같은 비중으로 바라보고 싶다. 시간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오늘 아침 서리가 하얗게 내린 마당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계절이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접시꽃 한 송이가 아직도 호젓하게 피어 있고 언덕 쪽에는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한껏 화려함을 뽐내고 있는가 하면, 닭장 옆에는 겨울에 하얀 설화로 피어나는 소나무가 푸르다. 마치 한 화병에 사계절의 꽃이 함께 꽂혀 있는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마당 안에 사계절을 보면서 어쩌면 한 사람 마음속에도 어린아이, 소년, 청년, 노년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 인생에도 사계절이 함께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인생의 계절은 결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잠재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이가 들어 시간의 흐름이 너무도 빠른 것을 절감하면서부터 오늘 하루가 당신 인생의 최초의 날, 최후의 날로 알고 살라.’ 하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계절은 작게 보면 시간의 매듭이며 크게는 삶의 과정과 같다. 삶의 과정을 보다 충실하게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놓은 것이다. 이것은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자성하여 새로운 내일을 보다 확실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1년의 세 번째 매듭인 이 가을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인 것이다. 낙엽을 보며 연둣빛 새싹이 돋는 봄을 꿈꾼다. 지금은 지난 계절 자신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부터 말끔하게 걷어내야 한다. 그래야 보다 빛나는 내일의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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