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나의 애독시(1165) : 텅 빈 충만 / 고재종

보름달2.jpg



텅 빈 충만 / 고재종

 


이제 비울 것 다 비우고, 저 둔덕에

아직 꺾이지 못한 억새꽃만

하얗게 꽃사래치는 들판에 서면

웬일인지 눈시울은 자꾸만 젖는 것이다

지푸라기 덮인 논, 그 위에 내리는

늦가을 햇살은 한량없이 따사롭고

발걸음 저벅일 때마다 곧잘 마주치는

들국 떨기는 거기 그렇게 눈 시리게 피어

이 땅이 흘린 땀의 정갈함을

자꾸만 되뇌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간간 목덜미를 선득거리게 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스적이는 마른 풀잎조차

저 갈색으로 무너지는 산들 더불어

내 마음 순하게 순하게 다스리고

이 고요의 은은함 속에서 무엇인가로

나를, 내 가슴을 그만 벅차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청함을 딛고 정정함에 이른

물빛 하늘조차도 한순간에 그윽해져서는

지난여름 이 들판에서 벌어진

절망과 탄식과 아우성을 잠재우고

내 무슨 그리움 하나 고이 쓸게 하는 것이다

텅 빈 충만이랄까 뭐랄까, 그것이 그리하여

우리 생의 깊은 것들 높은 것들

생의 아득한 것들 잔잔한 것들

융융히 살아오게 하는 늦가을 들판엔

이제 때 만난 갈대만이 흰 머리털 날리며

나를 더는 갈 데 없이 만들어버리고

저기 겨울새 표표히 날아오는 들 끝으로

이윽고 허심의 고개나 들게 하는 것이다

 


요사이 들녘에 나가 보셨는지요? 들판의 빛과 색깔이 사뭇 달라져 있겠지요. 황금빛으로 변해 가는 들녘,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건 그 아름다움 뒤에 숨은 수고로움과 땀과 눈물이지요. 그런데 먼저 늦가을 들판이 선사하는 그 너그러움을 나누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요. 텅 빈 충만함이 찾아들면 마음에는 갈증과 갈망이 사라진다고 하지요. 텅 빈 충만함이 찾아들면 마음은 늘 자유로워집니다. 텅 빈 충만함이 찾아들면 마음은 그지없이 평화로워집니다. 텅 빈 충만함이 찾아들면 마음은 참으로 풍요로워집니다. 텅 빈 충만함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를 갈라놓던 분리의 벽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교감과 공감과 공유와 공존이라는 아름다운 삶의 본 모습이 찾아든다고 합니다. 텅 빈 충만함은 우주의 진상(眞相)이며, 텅 빈 충만함은 마음의 본성(本性)이며, 텅 빈 충만함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하나로 합쳐지는 삶의 장이 됩니다. 옹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나()라는 장벽을 해체하는 일이야말로 텅 빈 충만함으로 가는 길이지요. 고착화된 자기란 언어의 벽을 해체하는 일이야말로 텅 빈 충만함으로 가는 길이고요. 부단히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갈망과 욕망을 해체하는 일이야말로 텅 빈 충만함으로 가는 올바른 길입니다. 일치와 일체로 향한 수행과 신앙의 참된 힘은 그곳으로부터 나오며 교감이 빚어내는 삶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스며들 게 된다고 합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텅 빈 충만, 그 순수하고 정순(貞純)한 에너지는 오직 깨어있는 인간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될 수 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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